남의 경험을 구경하느라 내 삶이 멸종해갈 때: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을 읽고

리액션 영상과 소셜 미디어 시대, 스크린에 빼앗긴 오감과 '지루할 권리'를 되찾는 법

책·영화·책··5분 · 조회 1

스마트폰 화면을 끄는 순간 불현듯 밀려오는 공허함.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진짜 무엇을 직접 경험했을까?" 타인의 경험을 소비하고 게시물로 인증하느라 정작 내 삶의 직접 경험을 잃어가는 시대,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을 통해 손글씨의 느림과 지루함이라는 '마음의 휴경지'를 되돌아봅니다.

스마트폰을 켜면 타인의 완벽한 일상이 실시간으로 피드에 차오릅니다. 유명 인플루언서의 여행 브이로그, 유행하는 식당의 상세한 리뷰, 남들이 영화나 음악을 감상하며 짓는 표정을 관찰하는 ‘리액션 영상’까지.

우리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직접 시도하기 전 남들의 경험부터 검색하고, 미지의 장소에 가보기도 전에 이미 다녀온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피드를 넘기다 불현듯 스크린을 껐을 때, 정적 속에서 기묘한 공허감이 밀려온 적은 없으신가요?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내 몸과 오감으로 진짜 무엇을 직접 경험했을까?"

크리스틴 로젠의 신작 『경험의 멸종 (The Extinction of Experience)』은 바로 이 서늘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테크놀로지가 주는 안락함과 속도에 취해 있는 사이, 정작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던 가장 원초적인 토대인 '직접 경험'이 소멸해 가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1. "간접 경험의 간접 경험": 경험이 느낌이 아니라 '게시물'이 될 때

이 책에서 가장 뼈아프게 와닿았던 대목은 현대인의 일상이 '매개된 경험(Mediated Experience)'의 이중 구조에 갇혀버렸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많은 시간을 우리의 직접 경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경험을 소비하는 데 쓴다."*

우리는 더 이상 낯선 골목에서 길을 잃지 않습니다. 지도가 최단 경로를 알려주고, 별점과 리뷰가 실패할 확률을 '0'으로 지워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감정마저 남의 반응을 통해 외주를 줍니다. 내가 직접 음악을 듣고 어떤 전율을 느꼈는가보다, "내가 이 음악을 들었다는 사실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의식하며 SNS에 올릴 게시물 프레임으로 경험을 재단합니다.

‘소유하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이 행복을 준다’는 발견 이후, 세상의 모든 것은 '경험 마케팅'이라는 이름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필터링되고 박제된 경험은 더 이상 살아 숨 쉬는 내 삶이 아닙니다.

직접 부딪히며 겪는 서툼, 당혹감, 땀 냄새는 깨끗이 탈취된 채, 그저 잘 팔리는 매끈한 디지털 데이터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2. 속도라는 황홀경과 '손으로 쓰는 느림'의 구원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에서 속도를 가리켜 "기술이 현대인에게 선사한 황홀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효율과 속도가 지고의 미덕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3초의 버퍼링조차 견디지 못하는 인내심의 빈곤을 겪습니다. 변화를 밀어붙이는 동력은 언제나 '효율성에 대한 맹목적인 욕구'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묻습니다. 효율이 극대화될수록 우리 몸의 감각과 지성은 과연 깊어지고 있는가?

*"우리는 손으로 적을 때 정보를 더 잘 유지한다. 손으로 기록할 때는 키보드보다 속도가 훨씬 느려서 요약해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린스턴 대학의 팸 뮐러와 UCLA 다니엘 오펜하이머의 연구에 따르면, 노트북 타이핑으로 필기한 학생들은 강사의 말을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치는 '받아쓰기'에 머물렀지만, 손글씨로 적은 학생들은 느린 속도 때문에 뇌 속에서 정보를 곱씹고 재구성하여 훨씬 뛰어난 개념 이해도를 보였습니다.

지난 일요일 제가 연구실에서 두툼한 연구 노트를 펼쳐 잉크로 하루치를 꾹꾹 눌러 적는 이유를 고백했던 것처럼, 손으로 쓰는 느림에는 뇌를 사색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키보드와 터치스크린이 제공하는 무한한 속도는 편리하지만, 펜 끝의 마찰을 느끼며 머뭇거리는 그 짧은 시간 속에 '생각의 근육'이 자라납니다.


3. 파스칼의 방, 그리고 지루함이라는 '휴경(休耕)'의 쓸모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현대인에게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일까요? 바로 '지루함(Boredom)'입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20초, 횡단보도의 파란 불을 기다리는 1분조차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 화면을 꺼내 듭니다. 지루함을 게으름, 비효율, 생산성 없는 시간 낭비이자 제거해야 할 절대 악(Bug)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7세기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미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조용한 방에 홀로 머물 수 없는 무능력에서 비롯된다."

책은 지루함에 대해 제가 가졌던 오랜 죄책감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농부가 다음 해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땅에 아무것도 심지 않고 비워두는 '휴경(Fallow)'처럼, 지루함은 게으름이 아니라 미래의 경작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필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때, 우리 뇌는 비로소 '기본모드신경망(DMN)'을 켜고 파편화된 기억들을 연결하며 깊은 통찰과 창의력을 빚어냅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매 순간 디지털 자극을 우겨넣는 뇌는, 거름을 주지 않고 혹사당해 메말라버린 사막의 토양과 다를 바 없습니다.


4. 안전한 '관광'을 넘어, 방향을 잃는 '여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 디지털 매개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어떻게 진짜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관광'과 '여행'의 결정적인 차이를 짚어줍니다.

**"관광은 안전하고 통제된 것, 미리 정해진 것이다.

여행은 예상치 못한 것, 방향 감각을 상실한 혼미한 상태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삶마저 안전한 '패키지 관광'처럼 살아가려 합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콘텐츠를 보고, 남들이 검증해 준 길만 따라 걸으며, 오차와 돌발 변수를 차단합니다.

하지만 약제학 실험에서도 계획된 가설이 어긋나고 엉뚱한 변수가 튀어나왔을 때 뜻밖의 돌파구가 열리듯, 인생의 진짜 배움은 '통제를 조금 내려놓고 방향을 잃어보는 순간'에 찾아옵니다.

헤매는 동안 바람의 온도를 느끼고, 낯선 사람의 눈을 맞추며, 예상치 못한 우연에 몸을 맡기는 태도. 그것이 바로 박제된 화면 밖으로 걸어 나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여행자'의 태도입니다.


💭 똑붕약사의 맺음말

저자의 외침은 기술을 모조리 파괴하자는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나 옛 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아닙니다. 화면 속에서 간접 소비되는 수천 개의 화려한 경험보다, 비록 투박하고 서툴지라도 '오늘 내 손과 발, 눈과 귀로 직접 만져본 단 하나의 진짜 경험'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따뜻한 권유입니다.

이 책을 덮으며 저는 작은 행동 하나를 다짐했습니다.

  • 책을 읽을 때 타이핑 대신 거친 펜으로 메모를 먼저 끄적여볼 것.
  • 그리고 하루에 단 15분만이라도, 스마트폰을 서랍에 넣어두고 나만의 '마음의 휴경지'를 만들어 조용히 머물러볼 것.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오늘 아침, 출근길이나 이동 중에 무심코 켜는 스마트폰 화면 대신 가만히 차창 밖 아침 햇살을 올려다보거나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온도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타인의 일상을 구경하느라 분주했던 시선을 거두고 내 오감의 스위치를 켜는 그 작은 틈바구니에서, 멸종된 줄 알았던 여러분만의 온전한 하루가 비로소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


📚 [도서 정보]

  • 도서명: 『경험의 멸종 (The Extinction of Experience)』
  • 부제: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이 집어삼킨 감각과 자아를 되찾는 법
  • 저자: 크리스틴 로젠 (Christine Rosen / 고현석 옮김 / 21세기북스)
  • 원제: The Extinction of Experience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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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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